젊은이를 위한 권고 / 잠언 3:1-12
잠언 3장 1-12절 / 젊은이를 위한 권고
- 너의 소원을 말해봐
제가 오늘이 청년 주일이라서 설교 제목을 “젊은이들을 위한 권고”라고 정하였습니다만, 사실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너의 소원을 말해봐’라고 말한다면 뭐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난 오래 오래 살고 싶어’ 라고 말하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오래 살면 뭐해요, 마음이 편해야지, 마음 속에 평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오래오래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다른 것도 다 있으면 좋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몸이 건강해야죠’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저는 부자가 되고 싶어요. 통장에 돈을 가득 채워 놓고 좀 여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분이라면, ‘저는 하나님께서 늘 풍성한 은혜를 주셨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겠지요? 여러분에게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으세요?
제가 지금 드린 말씀들은 사실 오늘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 우리가 바라는 그 모든 것들이 어디서 나오는가 생각해 보면, 사실은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들이지요.
- 내 아들아
오늘 말씀은 ‘내 아들아’라고 시작되고 있는데요, 잠언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지요. 아버지가 아들에게 다정하게 가르쳐 주듯 하는 이 표현은 솔로몬이 단지 자기 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닙니다. 왕으로서 자기가 통치하는 모든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면서,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항하여 인생의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글을 읽을 때 솔로몬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언제나 아버지가 그의 사랑하는 아들에게 말씀하듯 그렇게 말씀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만 찾아 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내 아들아~”이렇게 부르시는 것이 23회나 됩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거나 힘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도 그랬었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그래서 아주 어색했습니다. ‘자기 아버지는 어디 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나?’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진정한 우리 영혼의 아버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아 주신 우리 아버지도, 나도 다 그 분의 자녀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저절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신 것이 감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말씀에도,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빠’는 아버지를 더 친숙하게 부르는 표현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보다도 더 좋은 아버지 이십니다. 저도 두 아이의 아버지 이지만 아버지 노릇을 잘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늘 미안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변함이 없으신 분이시고,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여러분이 힘들고 지쳐 낙심하고 있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빠!’ 그 분은 여러분의 부름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 그리하면 … 하리라
오늘 읽은 말씀은, ‘ … 하라, 그리하면 … 하리라(되리라)’라는 ‘명령’과 ‘결과’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앞에는 하나님의 명령이 나와 있고, 뒤에는 그것을 순종하였을 때 어떤 결과를 얻게 될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그 말씀을 알고 있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지요.
1절을 보시면,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네가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되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지키는 사람은 힘이 듭니다.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감사함으로 받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는 것이 하나도 힘이 들지 않고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군에 가야 하는데요, 처음 신병훈련소에 가면 정말 정신 없이 훈련을 시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집합해서 훈련을 받고, 잠잘 때까지 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훈련을 받다 보면, 이게 훈련인지 벌을 받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온 몸에서 땀냄새가 사라질 날이 없을 만큼 힘들게 훈련을 받는데, 교관들은 온갖 핑계를 대서 각종 벌을 받게 합니다. 저녁에 침대에 눕고 나서야 쉼을 얻습니다. 신병들은 투덜투덜 불평을 합니다. ‘우리가 대학까지 다니다 온 사람들이 겨우 초등학교 1학년때 하던 것 같은 발 맟춰 걷기나 하고, 하나 둘 셋 넷, 구호를 부르며 구보(달리기)를 해야 하는지…, 엄마가 나 이렇게 훈련 받는 것 아시면 당장에 쫒아 오실 거라’는 둥… 그런데, 그렇게 한 주, 두 주 지나가면서 서서히 오합지졸이던 사람들의 무리는 군인이 되어 갑니다. 신병 훈련을 마치고 나면 완전한 군인으로서 어떤 명령에도 절대 복종하고,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만한 절도있고 용감한 군인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처음에 신병들은 교관의 마음을 잘 모릅니다. 그들이 얼마나 신병들을 신경쓰는지, 얼마다 조심스럽게 다루는지 모릅니다. 신병들의 허약한체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와 나태한 생각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서로 돕고 하나가 되는 공동체 생활에 적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애 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교관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교관과 하나가 되어 갑니다. 교관이 하나를 요구하면 두 개를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군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명령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명령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3, 4절 말씀도 볼까요?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인자’는 사랑, 자비, 긍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진리’는 진실함, 믿을 만 함, 참 됨 등으로 번역이 가능한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마음, 진실한 마음을 가져라!’라고 명령하실 때,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명령하시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너무나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너무 쉽게 그것을 버리니까 그런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사랑도 없고 용서도 없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것도 없습니다. 진실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을 살아 가는 방법은 이런데서 차이가 나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 교회의 표어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님의 사람”인데요,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가 달라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법정에 섰을 때-재판을 받기 위해 설 수도 있고, 재판을 하기 위해서 설 수도 있겠지요?-진실을 말하게 되면 자신에게 불리하지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직장에서 퇴사나 감봉의 위기 앞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만 알아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도 다 알아 본다는 것입니다. 저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 여러분이 있던 장소에서 떠나게 될 때, 아니면 떠나고 난 후에 사람들이 여러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저 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어, 나에겐 천사와 같은 분이었어!’라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전에 섬기던 교회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 그런 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그 교회 원로 목사님이셨는데, 세상을 떠난 지 오래 되셨지만 모든 교인들이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도 그런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들이 되기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5절에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와 대조되는 것은 ‘네 명철’이라고 했습니다. ‘네 명철’이란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지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물 위로 뛰어내렸을 때는 걸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근거해서 생각할 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방법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6절의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는 말씀을 원어대로 직역해 보면 “네 모든 길에서 여호와를 알아라”하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길에서 어떤 선택을 할 때 항상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방법과 달라서 가끔 사람들의 비웃음 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고 말해도, 비웃어도 그렇게 살면, 그 삶을 계속하면, 하나님께서 너의 길을 곧게 하실 것이라 했습니다. 길을 곧게 하신다는 말은 구부러진 길을 바로 잡는다는 뜻입니다. 내가 비록 부족해서 구부러져 있어도 펴 주시고, 그 길을 오히려 지름 길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먼 길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중에 보면 그 길이 더 바른 길이고 지름 길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삶에 어려움이 다가올 때에 관한 말씀도 있습니다. 11-12절 말씀을 보실까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
삶에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찾아올 때,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라면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문제가 꼬인 것일까? 혹시 하나님과의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만약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겨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 징계를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나를 버리지 않으셨어,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구나!’ 고통이 오히려 감사가 됩니다. 깨닫게 해 주셨으니까, 문제가 더 깊어지기 전에 돌이킬 수 있게 되었으니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징계라면 더 많이, 더 빨리 알려 주세요. 나를 흔들어 깨워 주세요.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 청년 여러분, 자신을 청년으로 여기는 모든 분들(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죄악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순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우리 몸을 더럽힐 유혹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야 하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넘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실, 오늘 제가 소개해 드린 이 말씀들은 제가 청년기에 많이 읽고, 많이 외우던 말씀들 입니다. 이 말씀이 저의 젊은 날을 지켜 주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도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늘 생각하며 후회 없는 청년의 시절을 보내심으로, 나중에 뒤를 돌아 보았을 때, 나의 청년의 시기는 내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전쟁터였고, 난 늘 승리했다!고 선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청년 시절에 항상 외웠던 말씀 한 절만 읽고 마치겠습니다. 6절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 하시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