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 / 요한복음 1:14-16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도입>
벌써 11월이 다 가고 이제 11월의 마지막 주가 되었습니다.(서로 격려해 줄까요? 지난 한 달 수고 많~으셨습니다. 참 잘~ 하셨습니다. 축복합니다! )
교회들은 전통적으로 11월 마지막 주부터는 ‘대강절’ 또는 ‘대림절’이라는 절기를 지켜왔습니다. 요즘 한국 개신 교회들 중에는 대강절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보니, 성탄절을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장식들은 쉽게 볼 수 있지만, 대강절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래서 대강절 장식을 보기도 쉽지 않습니다.
‘대강절(待降節)’이라는 말은, 기다릴 待, 내릴 降 해서, ‘예수님의 오심(탄생)을 기다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절기’라는 뜻 입니다. ‘오심’,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아드반투스)'에서 유래된 말이고 성탄절 앞의 4주 동안의 기간입니다.
대강절에는 화환에 촛불을 네 개 꽂아 두는 장식을 사용합니다. 화환은 사시 사철 푸른 상록수 나무가 쓰이는데, 나무의 가지를 동그랗게 고정된 틀에 끼워 만듭니다. 화환의 동그란 모양은 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하고, 상록수의 푸르름은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대강절 화환이 완성되면 그 위에 네 개의 초를 꽂습니다. 네 개의 초는 대강절의 네 주일을 뜻하는 것입니다. 촛불은 빛으로 오셔서 세상을 밝히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네 개의 초는 한 주일에 하나 씩 불이 켜 지는데, 이 때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구약 예언의 말씀을 낭독하게 됩니다. 크리스마스 트리의 오색 찬란한 화려함과는 달리 대강절에 밝히는 촛불은 소박하고 진지합니다.
촛불을 켜 놓고 보면 참 운치가 있지 않습니까? 불빛이 소박하면서도 불꽃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살아 있는 생명체 같기도 하지요. 촛불이 주는 감동은, 어두움을 몰아내고 주변을 환하게 밝혀 준다는 것과, 자신의 몸을 녹이는 희생을 통하여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본론>
마태 복음과 누가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을 소개할 때 당시 어떤 일들이 있었는 지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것에 중점은 둔다면, 요한 복음은 그것이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지를 보여주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 복음 1장 14절은 그것을 아주 선명하게 잘 나타내 줍니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요한복음은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 문화에 젖은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란 말이 헬라 문화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습니다. ‘말씀’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로고스’라고 합니다. 헬라인들은 이 ‘로고스(말씀)’라는 말을 철학적으로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전 6세기 경에 에베소에 헤라클리투스(Heraclitus)라는 철학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모든 만물이 계속해서 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그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한 번 몸을 담근 강물은 이미 흘러가서 다시 같은 물에 몸을 담그는 일이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계속해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 이렇게 변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혼돈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만물의 변화에도 질서와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만물이 질서 있게 움직이는 것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질서를 부여하는 "신적인 이성"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신적인 이성"을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이 로고스가 14절에 사용된 ‘말씀’(로고스)과 같은 단어입니다.
또한 헬라인들은,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로고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로고스’가 사람의 마음에 빛과 깨달음을 주고, 인간의 생각을 질서 있게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사람들이 신과 교통 할 수 있는 것도 ‘로고스’ 때문이며, 하나님에 대해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로고스’ 때문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후대 헬라 사상에 큰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플라톤, 소크라테스, 그리고 스토아 학파의 철학에 영향을 주었고,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헬라가 아테네에서 황금기를 맞았을 때에 플라톤은 자기 주변에 모여든 제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 어느 때가 되면 신으로부터 한 말씀, 즉 한 로고스가 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로고스가 모든 신비를 밝혀주고 모든 것을 분명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 마치 이사야 선지자 같지요?
그런데 요한 복음은 뭐라고 선포하고 있습니까?
« 말씀이 육신이 되어(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헬라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선포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 ‘말씀’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절에 보시면,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라고 선포하심을 통하여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여기서 ‘태초’라는 말씀은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라는 뜻이 아니고 ‘처음부터 스스로 계셨다’, ‘영원히 존재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로 «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 즉 성자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3절에는, 세상 모든 만물이 다 그 분에 의하여 지어졌고 그 어느 것 하나도 그 분 없이는 된 것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대로 되니라’, ‘그대로 되니라’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조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완벽한 창조의 완성을 선포하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요한은 바로 그 말씀이신 창조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우리 가운데 거하심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도 살펴 볼까요? ‘거하시매’는 ‘함께 산다’는 뜻입니다.
오래 전에 어떤 노숙자가 제가 섬기던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그 교회 1층은 기도실로 전기 온돌이 깔려 있어서 스위치를 올리면 안방처럼 따뜻하거든요. 날씨가 추워지니 아마 겨울 날 곳을 찾아 온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1년은 빨지 않은 것 같은 옷에, 한 달 간 세수 안 한 것 같은 얼굴, 입 냄새는 기본이고, 온 몸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냄새가 나는데, 얼마나 많이 나는지 사방 3,4미터 접근하기가 싫을 정도였습니다. 같이 마주 서 있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기도실에 와서 사는 겁니다. 새벽 예배에 가 보면 기도실에 냄새가 가득한 것입니다. … (중략) … 너무 냄새가 나니까 사람들이 다 그 옆에 앉지 않으려고 하고 힘들어 합니다. 목욕탕에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키고 나니까 완전 새 사람이 되더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지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런데, 얼마 지나고 다시 그 분을 만났는데 다시 옛날 그 모습으로 되돌아 갔더군요. 사람이 영혼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깔끔하게 씻어도 다 소용 없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 노숙자와 한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한다면 어떨까요? 정말 기도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폭력적이고, 싸우기 좋아하고, 남의 물건을 함부로 손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런 사람을 여러분 집에 들어오라고 하려면, 정말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다고 선언하였습니다. «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 2:1) 죽은 시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살아있는 노숙자 정도가 아니라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갖 죽음의 냄새가 나는 모습을 가진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말씀은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노숙자들 소굴에 들어가 사는 것은 고사하고 한 사람과 함께 사는 것도 힘든데, 거룩하신 예수님께서는, 본질상 죄인인 우리를 위하여, 사람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지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기 위해 오셨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예수님은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염려와 근심, 두려움에서 자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말씀하지 않으셔도 우리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3.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요한은 그러한 예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찾아오셨고,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함께 동행해 주셨고, 주님을 배반하고 도망쳤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와 주셨습니다. 늘 언제나 변함없이 사랑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 14절의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라는 부분에 오늘 이 부분에 여러분의 시선이 멈춰지게 하고 싶습니다. 14절을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합니다.
« 그 말씀이 육신이 되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
18절 말씀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예수님께서 나타내셨다고 말하였습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
창세기 6장 8절에는 노아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 그러나 이것을 불어 성경에는, Mais Noé trouva gâce aux yeux de l'Eternel.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히브리어 원어에 더 가까운 번역입니다. «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눈에서 은혜를 발견하였다. »고 번역할 수 있겠지요?
노아는 세상을 물로 심판 하시려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진노의 눈동자의 그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은혜를 발견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답답해 하고 고리타분 하신 분이라고 싫어하고, 너무 무섭다고 두려워할 때, 노아는 그 하나님의 본심을 깨달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사실 흠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아들들 앞에서도 실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은혜 안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의인’ 이라고 인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구원의 방주를 만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살아간 사람들,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인정해 주신 사람들은 모두 그분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랬습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에스더도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그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8:12에서,
«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두움을 다 몰아내고 밝히기에도 부족함이 없는 빛이십니다. 그러나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번 성탄절에도 거리를 아름답게 수놓은 크리스마스트리의 화려한 불빛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빛 속에 뭍혀 예수님의 빛을 볼 수 없다면, 그 빛의 화려함에 마음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져 예수님의 빛을 볼 수 없다면, 이번 성탄절은 여러분에게 가장 불행한 성탄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올해 다가오는 성탄절을 누구와 어떻게 보내야 할까요?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저는 여러분에게 보여주시는 빛 되신 예수님과 함께 깊이 교제하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