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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내 삶의 기준

2018.02.11 18:44 조회 수 : 23

설교일 2018-01-28 
성경본문 시편 119편1-16 
설교자 최성묵 목사 

시편 119편1-16 / 내 삶의 기준

 

   1. 서론 : 휴대폰(인터넷)과의 전쟁


최근에 한국에서 몽펠리에를 다녀가신 분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참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지난 번에 몽펠리에에 오셨을 때는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있어서 무척 감명을 받으셨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오니 휴대폰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져 있어서 마음이 씁쓸하더랍니다. 책 읽는 사람이 눈에 보이게 줄었다는 말씀이지요.

 

최근에 파리에 갔다가, 우리 교회 출신으로 프랑스 인문학 서적을 100권 이상 번역하신 번역가이시고 저술가로 활동하시는 집사님과 이런 현상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는데, 이 현상이 인문학의 엄청난 퇴보를 가져오고 있다고 우려하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책을 거의 읽지 않아서 자기 분야의 아주 좁은 부분은 잘 알지 몰라도 조금만 범위가 넓어지면 아무 것도 모른답니다. 예를 들면, 주변에 미술을 전공하는 분들에게 어떤 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거나, 음악을 하는 젊은이들과 어떤 음악가에 대하여 대화를 나눠 보면 잘 모른답니다. 그저 자기가 하는 음악 외에는 음악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고, 그래서 이제는 젊은이들에게 뭘 물어보기가 걱정이 된답니다. 그러시면서 가장 큰 원인을 휴대폰으로 꼽으셨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휴대폰 때문에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지요? 어쩌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휴대폰에 너무 매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요. 그렇다고 끄고 다닐 수도 없고… 사실, 저도 제 아내에게 많이 지적을 받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수시로 휴대폰을 확인하고, 거기 매여 살아가는 것을 발견하곤 깜짝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서는 그 이유를 알겠더군요.

 

얼마 전에 제가 주보에도 짤막하게 소개했습니다 만, 페이스북에서 부사장을 지냈던 분(차마스 파리하피티야)이 작년 연말 스탠퍼드 경영 대학원 강연회에 나와서 한 말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20억 명의 회원수를 늘리고 회사를 성장 시킨 데 대해 “엄청난 죄책감(Tremendous Guilt) 느낀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단기간의 도파민(뇌신경물질) 추진 피드백 순환고리(short-term, dopamine-driven feedback loops)는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파괴하는 도구를 만들어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등 소셜 미디어를 만드는 사람들은 인간의 심리적 성향을 파악해서, 사람들이 최대한 이 소셜미디어에 자주 들어오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렇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용자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중독 상태가 된답니다. 그리고 쓰레기 같은 정보들이 가득 채워지면서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서로 연락하고 교제하는 좋은 장소로 사용하기 보다는 인간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 미워하거나 질투하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부사장이었던 분이 이렇게 말했더군요. “여러분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러분의 행동은 프로그램화 되고 있습니다. (누구에 의해서?) 그러니, 소셜 미디어에서 벗어나 충분한 휴식을 취하십시오.”

 

그래서 이런 기업을 이끄는 기업의 경영진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자녀들도 페이스북을 절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휴대폰 하나만 가지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늘 시간이 없습니다. ‘잠깐 잠깐 보는 것 뿐인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공부할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눈은 늘 피곤하고… 읽어야 할 책들도 읽지 못하고, 성적은 점점 떨어지고 내 꿈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 가 버립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치밀하게 계획한 사람들에 의하여 우리가 서서히 조종을 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에는 편리한 기능이 참 많습니다. 그것을 잘 활용하면 너무 좋지요. 그런데 우리가 마음을 약간 느슨하게 먹는 순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들이 우리의 삶의 기준으로 자리잡곤 하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야기 합시다. “이젠 휴대폰 보지 말고, 저와 이야기를 해 주세요! ” ㅎㅎ )

 

    2. 본론


        (1) 시편 119편에 담긴 교훈

 

시편에는 답관체라는 형식을 가진 시들이 있는데요, 히브리어의 알파벳 순서대로 글머리를 시작하는 것입니다(우리가 삼행시 놀이 하듯이 정해진 글자로 시작하여 문장을 이뤄 가는 것이지요). 히브리어 알파벳의 ‘알렙’, ‘베트’ … 이런 순으로 알파벳대로 시를 쓰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시편이 바로 시편 119편입니다. 각 알파벳으로 시작하되 8절 씩을 같은 알파벳으로 시작하다 보니, 총 179절의 긴 시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긴 절수를 가진 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의 말씀에서, 저자는 시(찬양)를 통하여 어떤 사람이 진짜로 행복한 사람인 지를 노래하고 있는데요, 그의 마음 속에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노래합니다. 한 번, 1-2절을 읽어볼까요?

 

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노아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습니다. 창세기 6장부터 등장하는 노아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한 번 찾아 볼까요? 창세기 6장 9절 말씀을 보면,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사람으로 여김을 받던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나 삶의 모습으로나 사람들에게 비난 받거나 손가락질 할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나 봤더니, 그에게는 분명한 삶의 기준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처럼 세상 살이를 즐기려 하지 않았고, 세상에 매여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을 때에, 그는 그 말씀에 순종할 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겠죠. 그렇게 큰 배를 무엇에 쓰려고 만드느냐고? 그 배 크기가 축구장 크기보다도 더 컸으니까요. 큰 홍수가 밀어닥칠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경고를 했지만 그 말에 심각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방주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을 때, 노아의 방주에 올라탄 사람은 그저 노아의 식구들이 전부였지요.

그러나 노아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신경 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노아의 삶의 기준이 되었던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그와 그의 온 가족을 구원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시편 119편 1-2절의 말씀을 읽는 순간,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단어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게 느껴질 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말씀이 편한 말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가 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으신 분이시고, 얼마나 나에게 관심이 많으시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시는 분이라면 저절로 ‘아멘’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놀고 있는데 그 부모님께서 보시니 아이가 노는 곳 주변에 위험한 곳들이 많이 있는 것이에요. 공사 현장도 있고, 깊은 웅덩이도 있고, 차들이 쌩쌩 지나다니는 도로가 옆에 있어요. 그래서 아빠는 아이에게 이야기 해 줍니다. “얘야, 지금 놀고 있는 이 놀이터에서 재미있게 놀고, 밖으로 나가지는 말거라. 만약 나가려면 나에게 이야기 하렴. 내가 함께 나가 줄께. ” 아이가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가 좀 지루해 졌어요. 옆에 공사장에 가면 숨을 곳도 많고, 웅덩이에는 물이 있어서 물놀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나가고 싶은데 아빠가 나가지 말라고 하셨으니 어떻게 해야 하죠? 그렇지만 그 아이는 너무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서 아빠 몰래 놀이터 밖으로 빠져 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아이는 아빠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아빠의 말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그것은 아빠의 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빠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해요.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아마도 그 아이는 엄청난 위험에 직면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다면, 그 분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길 겁니다.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도해요.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표준 새번역 성경에 보니, 이렇게 번역하고 있어요.

“ 내가 주님의 율례들을 성실하게 지킬 수 있도록, 내 길을 탄탄하게 하셔서 흔들리는 일이 없게 해주십시오. ”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마음이 변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삶의 기준을 하나님의 말씀에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라 하시면 가고, 서라 하시면 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경 다니엘서 1장에 보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 세 사람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유다 왕국을 정벌한 느브갓네살 왕은 유다 안에 있는 온갖 기물들을 약탈해 갑니다. 그리고 왕궁에서 쓸만한 젊은 인재들을 데려가 왕실 교육을 시킨 후에 자기 나라에 필요한 사람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정복 국가들이 벌이는 일반적인 일들이지요. 이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넉넉하게 다 공급해 줍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의 이름까지 바꿔 버립니다. 우리 나라는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이미 겪었던 일들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잘 압니다. 식민지 사람들의 정체성을 지워 버리려는 것이지요. 국민성을 완전히 개조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 다니엘은 친구들과 함께 결심합니다. 다니엘서 1장 8절 말씀을 볼까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기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당시 왕의 음식이란 제사 음식이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으면 제사를 드린 신의 뜻을 받들겠다는 고백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의 결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담당 공무원이 기겁을 합니다. “ 아니, 내 목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싶어서 그러냐? 너희들이 몸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그 벌을 받게 될 것인데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 때, 다니엘은 열흘 동안 채식을 하겠다고, 그 뒤에 다시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결국 왕의 진미를 거절하고도 당당하게 그곳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그가 생각했던 한 가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의 삶의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었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고, 비록 포로로 끌려갔지만 그곳에서 바벨론의 모든 신하들보다도 탁월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성경은 진짜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9절 말씀에는,

“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만’이란 무슨 의미일까요? 그 이외의 것들과 구분되고 구별된 삶을 살아가겠다는 결심입니다. 청년의 때에 삶의 기준을, ‘말씀에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17세의 젊은 청년의 때에 형들로부터 배반을 당해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억울한 일로 인하여 감옥에도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감옥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들어가도 감사할 수 있었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요셉을 높여 이집트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말하기를,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자리 뿐이다”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실제적인 실세는 바로 요셉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의 본색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창세기 50장에 나옵니다. 우리 잠시 창세기 50장 15절 말씀을 찾아 볼까요? 요셉이 승승장구 하는 동안 아버지 야곱이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러자 모든 형들이 두려워서 벌벌 떱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으니 혹시나 우리에게 복수를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요셉에게 사람을 보내서, “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우리에게 유언을 하셨는데, 형들을 용서하고 절대로 형들에게 복수해서는 안된다고 하더라”고 이야기 합니다. 찾아가서 엎드려 빕니다. 그 때 요셉이 뭐라고 말합니까? 19절부터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복수하기는 커녕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복수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아주는 것! 진정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 입니다. 요셉의 삶의 기준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에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요즘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베드로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이름 없는 어부에 지나지 않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배신자이고,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 곁을 피해 도망쳤고,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인간이란 어쩔 수 없어! 은혜도 모르는 게 인간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실패하고 지친 베드로에게 찾아 가셨고,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 장면은 참 제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새벽에 저 바다 안쪽에서 지친 모습으로 고기를 잡는 베드로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을 위하여 바닷가에서 생선을 굽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맛있게 익은 생선을 나눠 주셨습니다. 언제나 변함 없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


베드로는 그 사랑을 깨닫고 나서 다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시편 19:10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하여,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송이 꿀이란, 벌집에 들어 있는 대로의 꿀 또는 벌통에서 갓 떼어낸 덩어리 꿀을 말합니다. 하나님의말씀에 대하여 이 사람이 왜 그렇게 고백하나 봤더니 … 7절부터 보면 이렇습니다.

 

7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9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10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 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1장 24-25),

“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렇습니다. 온 세상이 다 변하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도전을 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올 해는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의 기준은 하나님께 두는 복된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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